[2019.05.10 월간중앙]남수단에 망고나무 4만 그루 심은 패션 디자이너 이광희
“기술적인 건 그 다음 성공의 비결은 인내뿐”
저개발국에 재봉·목공 기술 가르치는 등 자선사업 벌여
▎이광희 리패션시스템 대표가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10년 넘게 아프리카 오지를 오가며 봉사활동을 펼치게 된 사연을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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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트 쿠튀르(Haute courture)’는 고급 맞춤복을 뜻하는 프랑스어다. 특히 상류층 여성이 입는 고급 옷을 칭하는 말이다. 우리나라 오트 쿠튀르를 상징하는 패션 디자이너 두 사람이 있다. 고인이 된 앙드레 김(1935~2010), 그리고 이광희(67)다.
동료들과 점심식사 자리에서 ‘레전드를 찾아서’ 시리즈에 대해 얘기하던 중 누군가가 “우리나라 오트 쿠튀르의 레전드, 이광희 선생 어때요?”라고 인터뷰 후보로 제안했다. 별로 내키지 않았다. 패션에 별 관심이 없는 데다 왠지 쳐다보기도 어려운 부유층의 욕망을 대변하는 사람 같아서였다.
이광희를 추천한 인사는 “우리가 대학 다닐 때 맞선 보면 무조건 이광희 입고 나갔고, 만남이 잘돼 결혼식을 하면 이광희 웨딩드레스를 입었어요”라며 “나도 그런 편견 때문에 처음엔 무척 싫어했는데 만나 보니 전혀 다른 사람이데요”라고 했다.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봤더니 해맑은 표정으로 웃고 있는 이광희 리패션시스템 대표의 사진이 나온다. 그 곁에 팔다리가 앙상한 아프리카 원주민이 서 있다. 알고 보니 이 대표는 아프리카 최빈국 남수단에 희망의 망고나무를 심는 ‘희망고’라는 사단법인을 10년째 이끌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남수단에서도 가장 소외된 지역인 한센병 환자 거주지에 복합 건물을 완공했다고 한다. 그 멀고 위험한 곳에 여성 혼자 혈혈단신 찾아간 것이다.
호기심이 생겼다. 우리나라 최고 상류층이 입는 옷을 만드는 여성 디자이너가 10년 넘게 아프리카 오지를 다니며 망고나무를 심고 있다니. 게다가 이광희 대표의 부친은 ‘맨발의 성자’로 불리며 전남 해남 땅끝에서 전쟁고아들과 한센병 환자들을 돕는 데 일생을 바친 고(故) 이준묵 목사가 아닌가.
서울 한남동 남산자락 하얏트 호텔 옆에 이광희 부티크가 있다. 토요일 오후, 직원들도 손님도 없이 고즈넉한 공간에서 우리는 차를 마셨다. 가구와 소품, 꽃꽂이와 심지어 찻잔조차도 고급스럽고 운치가 있었다. 2층에 올라가니 서울 시내가 한눈에 보였다. 동그란 검은 테 안경에 커트머리를 한 이 대표는 50대 이상으로 보기 어려울 만큼 ‘지나친’ 동안(童顔)이었다.
여기가 대한민국 고관대작 부인들이 한 번씩은 다녀갔다는 의상실인가요?
“이순자 여사, 이희호 여사, 김윤옥 여사 등 대통령 영부인과 대기업 오너 부인들의 옷을 지어드렸죠. 저는 서슬 퍼런 전두환 정권 때도 청와대에 안 들어갔어요. 누구든 내 옷을 입고 싶으면 직접 와서 가봉을 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지요. 지금까지도 제 고객과는 밥 한 번 먹은 적 없어요.”
대통령 영부인도 직접 와서 가봉하는 게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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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옷 로비 사건’ 때 고초를 좀 겪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부티크가 옷 로비의 무대이고, 여기서 최상류층끼리 중매가 이뤄지고, 한 벌에 500만원짜리 옷이 팔린다는 내용의 기사가 한 일간지에 실렸어요. 제가 그 신문사 사회부장에게 전화를 한 뒤 편집국으로 찾아갔어요. ‘왜 와서 취재도 하지 않고 추측과 ‘카더라 통신’에 의존해서 기사를 씁니까? 해외 명품 옷이 500만원 이상에 팔릴 때 그만한 값을 받지 못한 게 억울해서 지금도 죽어라 일만 하는 사람’이라고 억울함을 토로했어요. 기사를 쓴 기자들은 아무 소리 못했고, 사회부장이 정식으로 사과했죠.”
이광희 대표는 해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광주 전남여중-서울 이화여고를 거쳐 이화여대 비서학과를 졸업했다. 해남에서 전남여중에 올 정도면 ‘수재’ 소리를 들을 정도였지만, 고교 때는 공부보다는 ‘인생의 본질과 가치’를 더 많이 고민했다고 한다.
비서학과에 간 것도 겉멋이 아닌 실용을 찾아서였고, 졸업 후 ‘남의 글 타이핑 치는 것보다는 내 일을 하자’는 생각에 패션으로 길을 바꿨다. 이후 국제패션연구원을 수료하고 1985년 이광희 부티크를 열었다. 1987년 인기 드라마 [사랑과 야망]에서 원미경이 입은 공주 옷이 유명세를 치르면서 ‘이광희 패션’이 장안의 화제가 됐다.
일찍 성공한 비결이 뭐냐는 질문을 많이 받죠?
“제가 서른다섯 살부터 톱 소리 들었으니 일찍 성공한 게 맞긴 하죠. 비결이요? 책임과 인내, 딱 두 가지죠. 디자이너로서 좋은 옷을 만들 책임이 있어요. 40년 전 제 캐치프레이즈가 ‘숨겨진 아름다움을 찾아드립니다’였어요. 좋은 옷은 고객이 입었을 때 자신의 아름다움이 드러나게 해주는 옷입니다. 기술적인 건 그 다음이죠. 또 하나 성공의 비결이 참는 겁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제게 ‘오늘도 참아봤느냐’고 말씀하셨어요. 선택의 순간 늘 제 기준은 ‘어려운 쪽’이었어요. 옷도 어렵게 만드는 걸 택했는데, 결국 정성이죠. 한 번 할 것을 두 번 하는 것. 어머니는 제가 이 일을 시작할 때부터 ‘혼을 박아 일하라’고 하셨어요.”
디자이너로서 톱에 올라선 계기가 있었을 텐데요.
“제가 패션계 뛰어들 당시 최고로 인정받던 디자이너 선생님 숍에서 일을 도와드렸어요. 처음으로 기성복을 만들기 시작할 때인 1974년 당시 코트가 9만9000원, 원피스가 3만3000원에 팔렸어요. 충무로 영락교회 옆 골목에 공장을 만들고 그 옆에 숍도 열었죠. 말도 안 되는 위치였는데 재벌 부인들이 몰리면서 장사가 정말 잘 됐어요. 그러자 그 선생님이 몇십 년간 함께 일한 재단사 언니를 내쫓고, 저도 쫓아냈어요. 당시는 눈이 짓무를 정도로 울고 마음도 많이 아팠는데, 그 재단사 언니가 ‘네가 숍을 열면 내가 기술 다 가르쳐줄게’라고 제안해서 함께 일하게 됐죠. 그 언니 덕분에 최고 기술을 익히게 됐으니 저로선 전화위복이 된 셈이죠.”
이광희가 가진 자들 허영 채워주고 부추긴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죠?
“정말 많이 들었죠. ‘과소비’ 말만 나오면 제가 타깃이 됐으니까요. YS 정권 때는 이광희 부티크 앞에 주차한 차량 번호를 (정보기관에서) 적어간다는 말도 나왔죠. 난 그런 건 아니라는 소신이 분명히 있었어요. 항상 새로운 장르와 컬래버레이션(협업)을 시도했고, 호텔에서 패션쇼 할 때도 전부 티켓을 팔았고, 그 수익금은 도네이션(기부) 하는 문화를 만들었어요. 저는 이래 봬도 한번 정하면 밀고 나가는 소신이 있어요.”
제일 비싸게 판 옷이 기억나시나요?
“아무래도 웨딩드레스죠. 세계적인 거부인 재일동포 3세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가족이 일본에서 전화를 해 왔어요. 집안에 며느리를 들이는데 제 드레스를 입히고 싶다고요. 신부 될 사람이 직접 찾아와 가봉을 하고 갔는데, 물건 보내놓고 보니 뒤에 다는 리본을 빠뜨린 겁니다. 부랴부랴 제가 갖고 갔고, 덕분에 재벌가 결혼식도 봤고요. 국내 웬만한 명문가 웨딩드레스는 다 해본 것 같아요.”
남다른 옷을 지으려면 감각이나 아이디어도 남달라야 할 것 같은 데요.
“디자인의 모티브가 되는 영감을 얻기 위해 가장 노력한 게 책을 많이 읽는 것이었어요. 패션 잡지가 아니라 인문학 서적 같은 거죠. 일주일에 두 권 정도 읽었는데 제겐 책 읽는 게 마음 다스리는 일이었어요. 읽고 나면 맘도 편안해지고, 생각할 여유와 자양분이 생겨요. 디자인 하기 앞서 그런 여유가 생겨야 사물의 아름다움도 볼 수 있고 주변도 볼 수 있는 거죠. 이화여대 디자인대학원에서 겸임교수를 할 때 학생들에게 감성일지를 쓰게 했어요. 테크닉은 어디서나 배울 수 있지만 매일매일 사물의 새로운 걸 보는 훈련은 어디서나 할 수 없죠. 저는 지금도 이화여대 철학과 대학원에서 늦공부를 하고 있어요.”
제자도 많이 키우셨겠네요.
“패션으로 성공한 케이스는 많지 않지만 각 분야에 많이 나가 있어요. ‘이광희에서 일했다’ 하면 다 잘 됐어요. 저희 숍에서는 기본적인 옷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을 진심으로 모시는 훈련을 받거든요. 꽃꽂이, 선물 포장, 차 대접 이런 것들이요. 여기 매니저 했던 친구들이 시집을 잘 가요(웃음). 어머어마한 집 사모님도 저희 직원을 보면서 ‘쟤 첨에 올 때 저런 애 아니었는데…. 우리 딸도 여기서 일하면 안 돼?’ 할 정도니까요. 그 친구들에게 독서교육 굉장히 많이 했어요. 매일 독후감 쓰게 하고. 하하하.”
10년 동안 망고나무 4만 그루 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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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희망고’ 얘기를 할 시간이다. 패션쇼를 하면서 늘 ‘자선’을 앞세웠던 이광희 대표는 2009년 월드비전 홍보대사인 탤런트 김혜자씨를 따라 아프리카 남수단의 톤즈에 처음 갔다.
내전과 기아에 찌든 그곳은 열악하다는 표현 자체가 사치일 정도였다. 비가 오지 않는 건기에는 모든 것이 말라붙었고, 땅에는 흙먼지만 피어 올랐다. 그나마 유일한 먹을거리가 망고였다. 1년에 두 번 수확하는 망고는 열량과 영양이 풍부하고, 심은 뒤 7년이면 열매를 맺기 시작해 100년 동안 열매를 낸다. ‘바로 이거다’라고 무릎을 친 이 대표는 여비를 몽땅 털어 망고나무 100그루를 사서 심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남수단 톤즈에 희망의 망고나무 심기를 지속적으로 하리라 다짐하고 재단을 만들었다. 마케팅 전문가인 남편 홍성태 교수(한양대 경영학과)가 ‘희망고’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10년이 지난 지금 톤즈에만 4만여 그루의 망고나무가 심어져 희망의 열매를 맺고 있다. 이 대표는 2011년 남수단 정부의 도움을 받아 1만 평의 땅에 복합교육문화센터인 희망고 빌리지를 지었다. 그곳에서 현지인에게 재봉·목공 등 기술을 가르쳤다. 유치원 아이들 책걸상은 목공을 배운 아빠들이, 교복은 재봉기술을 익힌 엄마들이 만들어줬다. 톤즈 관할 주 정부는 영국 식민지 시절 만든 10만평 규모의 망고농장을 희망고에 맡겼다.
이 대표는 지난 3월, 톤즈의 한센인 거주지역에 다녀왔다. 한센인을 위한 복합건물이 4년의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완공된 것이다. 이 대표는 이번에도 혼자 비행기를 탔다. 인천국제공항을 떠나 케냐 나이로비∼남수단 수도 주바∼톤즈로 이어지는 꼬박 이틀의 여정이었다.
이번엔 어떤 일정이었나요?
“한센인 지역은 톤즈에서도 가장 소외되고 사람들이 기피하는 곳입니다. 그곳에 건물을 짓기 위해 4년 동안 추진했는데 책임자가 다섯 번이나 바뀌었어요. 포기하기 직전에 현지인들과 제가 직접 뛰어들어 결국 해냈어요. 평일엔 아이들 학교, 진료센터로 쓰이고 일요일은 예배당으로 쓸 수 있는 건물입니다. 희망고 빌리지 미싱학교 졸업생들에게 일감을 줘서 남자들 옷 150벌을 만들었고, 여자 한센가족을 위해선 침대커버를 만들어 줬더니 낮에는 드레스, 밤에는 이불로 요긴하게 썼어요. 120가정에 두 달 먹을 밀가루 배분까지 한 뒤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신명나는 잔치를 하고 왔습니다.”
이번 일정이 가장 힘들었다고 하던데요.
“못 갈 이유를 대자면 수십 가지도 넘었죠. 제가 기침이 심한데 초기에 못 잡으면 점점 심해져 천식까지 가요. 나이로비부터 기침이 시작돼 정말 힘들었어요. 주바에서 톤즈 가는 비행기를 놓쳐 경비행기를 신청했는데 잠자리 같이 생긴 게 ‘이거 제대로 정비는 했을까’ 싶을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어요. 짐도 용량을 엄청 초과해서 싣고요. 하필 얼마 전에 남수단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로 탑승객 24명 전원이 사망했다는 뉴스도 나왔고요. 초긴장 상태로 1시간을 날아갔지요.”
김혜자 “넌 바늘로 바위를 뚫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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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게 위험하고 힘든 곳을 가시나요?
“이번에 한센인 건물 짓고 와서는 잘 안 울어요. 그 전에는 많이 울었어요. 정말 그 사람들이 보고 싶어서. 김혜자 선생님이 ‘너 정말 대단하다. 바늘로 바위를 뚫었네’ 하시더라고요. 왜 한센인 마을까지 가냐고요? 그건 제 마음이 아니에요. 엄마·아버지가 잘못 가르친 거지(그녀는 웃으며 말을 시작했지만, 웃음 끝에 울음이 배어 나왔다). 저는 믿음 없는 사람이지만, 이 사람들은 내가 안 가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어지겠다 싶었어요. 그걸 깨고 싶지 않아서, 죽으면 죽지하는 심정으로 갔어요. 유언장 쓰고 가려고 했는데 바빠서 못 썼어요(웃음).”
희망고 프로젝트는 누가 도와주나요?
“처음에는 상근 직원들도 몇 명 있었는데 인건비 부담 때문에 몇 년 전부터는 거의 혼자서 하다시피 해요. 우리 직원들이 좀 도와주고요.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하고 직접 뛰면서 하루도 편하게 지낸 날이 없고, 하루도 진땀이 안 나는 날이 없었어요. 저도 그런 내가 싫어요(웃음). 다섯 군데 백화점에 있던 이광희 매장도 희망고 일 본격적으로 하면서 하나씩 정리했어요. 지금은 남산의 부티크 하나뿐이죠. 재원은 바자회·음악회·패션쇼 같은 행사를 통해 마련합니다. 월 회비를 내는 분도 있지만 미미합니다. 사람들은 ‘후원자가 몇 명이냐’ ‘1년에 얼마나 돕나’ 같은 숫자로 평가를 많이 합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숫자로 해선 안 됩니다. 수없이 많은 곳에서 조그마한 손길들이 일하고 있어요. 숫자 때문에 그들이 하는 일의 가치가 떨어져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세상이 좋은 일을 좋게만 생각하는 건 아니다. 기부·봉사 등에 대해 삐딱한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가진 자의 기부 행위에 대해선 ‘위선적’이라는 색안경을 쓰고 보는 경우가 많다. 이 대표 생각은 어떨까.
“그런 말은 하도 많이 들어서 이골이 났죠. 어머니는 늘 ‘선한 일은 바로 해야 한다. 내일로 미루면 악한 일이 된다’고 하셨어요. 우리나라는 3만원으로 누굴 얼마나 도울 수 있을까요. 3만원으로 톤즈에 망고나무 하나 심으면 100년을 한 가족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니까 요즘 말로 ‘가성비 최고’잖아요. 제가 아프리카 얘기하면 ‘그래서 더 어려운 데 가서 한다는 거지?’ 라고 비아냥대는 사람이 있어요. 제가 얼마나 더 유명해지고 싶어서 그럴까요. 이것 말고 훨씬 덜 위험하고 덜 어려운 일로도 유명해질 수 있거든요.”
가녀린 몸피와 만만해 보이는 외모에 감춰진 이광희 대표의 강단과 소신은 필시 부모로부터 물려받았을 터이다. 2남 3녀의 넷째로 태어난 이광희는 순명과 봉사로 점철된 이준묵 목사와 김수덕 여사의 삶을 보며 자랐다.
“부모님을 보면서 말보다는 실천을 배웠어요. 교회에서 기도만 하고 말만 하는 걸 싫어했어요. 사람들이 왜 기도하지? 자기가 하면 되는데 왜 하나님한테 그러지? 그게 굉장히 이상했어요. 중고등학교 때 착하다는 말 많이 들었는데 그게 싫었어요. 철 들고 다짐한 게 ‘절대 착한 사람 되지 말아야겠다’ 였죠. 착한 사람이 주는 폐해를 너무 많이 봤거든요. 착한 사람이 되지 말고 책임 있는 사람이 되자고 다짐했죠. 왜 사냐고 물으면 책임감 때문에 산다고 할 겁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니까 사람 노릇 하는 거죠.”
이준묵 목사는 ‘하나님 전상서’ 이야기에도 등장한다. 전남 해남의 시골 소년이 편지를 한 통 썼다. ‘하나님 저는 공부하고 싶습니다. 굶어도 좋고 머슴살이도 좋으니 제게 공부할 길을 열어 주십시오’ 그리고 겉봉에 ‘하나님 전상서’라고 쓴 뒤 우체통에 넣었다.
집배원은 이 편지를 해남읍교회 이준묵 목사에게 배달했다. ‘하나님 대신에 이 편지를 받을 사람은 이 목사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편지를 읽은 이 목사는 아이를 데려다 재우고 먹이며 공부를 시켰다. 훗날 이 소년은 스위스 유학을 하고 신학박사가 됐다. 오영석 전 한신대 총장 이야기다.
이준묵 목사는 평생 ‘참’이라는 글자를 자신의 방에 붙여 놓고 살았다. 참되게 살기 위해 끝없이 노력했다. 부인 김수덕 여사가 남긴 일기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목사님 만난 지 33년인데 새벽 3시반에 기상해 냉수마찰을 한 후, 높은 산 솔밭에 마련한 하나님과의 대화 제단에서 자신을 쳐, 자신을 지키는 일을 하루라도 거르는 걸 보지 못했다. 오늘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고 몹시 추운 새벽인데, 이 모든 것을 개의치 않고 나가신다. 사람의 정신적인 생활이 육체를 괴롭게 해야 되는 것을 나는 느꼈다. 일면 안타까운 생각도 들지만, 굉장하고 장하시다. 저분이 이러한 과정을 계속 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닥쳐오는 모든 문제를 처리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에게는 괴로움도 평안도 없는 것 같다. 나는 저분이 과한 오점이 없이 생을 마무리하기를 소원할 뿐이다.” _1968년 2월 21일
착한 사람 말고 책임 있는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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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표에게 잊히지 않는 어머니의 모습을 얘기해 달라고 했다. “엄마, 바람 같구나. 그런 생각…” 한동안 말이 끊겼다. 동그란 안경 아래로 눈물이 또르르 떨어졌다. “재작년에 혼자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어요. 톤즈 가려고 보름을 빼놨는데 내전이 터지는 바람에…. 끝없이 이어지는 밀밭길을 걸으며 바람에 밀밭이 일렁이는 모습을 보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사랑·시간 같은 것들이 너무나 확실한 결과물을 만드는구나 생각했어요.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스쳐가는 순간 결과가 남아요. 색깔이 바뀌든지, 모양이 바뀌든지. 엄마도 그러셨어요. 나비처럼 사뿐하게, 여기 앉아 있는 것 같은데 저기 가 있고, 이 사람 돕는 것 같은데 어느새 저 분과 함께 있고. 저 사람이 잠은 언제 자지? 했어요. 그분은 말이 없으셨어요. 말하는 시간도 아까운가 보다 짐작했어요.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 같은데 확실한 결과가 나오는 사람, 저도 그분을 닮고 싶었어요.”
앞으로 희망고는 어떻게 될지 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한 가지 확실한 건 현지인들이 책임지고 움직이는 걸로 방향을 전환했는데, 그것도 쉽지 않죠”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른 NGO 단체 사람들이 “현지인들에게 맡겼다가 다 뺏기면 어떡하냐”고 묻는다고 한다.
“그럼 너무 좋죠. 제발 좀 찾아가서 자기들 책임 갖고 할 수 있다면요. 저는 처음부터 신뢰 관계로 일했어요. 10년 동안 컨테이너 9개를 그 오지로 보내는데 한 번도 사고가 안 났어요. 뺏기거나 전복되거나 중간에 빼돌리거나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거든요. 그런데 저희 컨테이너는 2년 동안 주인 없이 방치돼도 훔쳐가는 사람이 없었어요. 믿음과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이 일을 할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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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표는 20여 년 전, 영화에나 나올 법한 끔찍하고 무서운 일을 겪었다. 갖고 있던 재산도 다 뺏겼다. 그 트라우마를 이겨내는 데 꼬박 3년이 걸렸다고 했다. 희망고 일을 하면서도 숱한 사람들로부터 이용당하고, 오해받고, 고통을 당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늘 방실방실 웃는다. 톤즈에서 ‘마마 리(Mama Lee)’로 불리는 그녀의 미소는 아프리카에서 더 아름답다.
원고를 마감하는 날 아침 이 대표한테서 전화가 왔다. “앞으로 희망고가 어떻게 될 거냐고 물으셨죠. 생각해 봤는데, 제가 건기에 톤즈에 갔기 때문에 망고나무만 보였던 거지 우기에는 다른 작물들도 잘 자라요. 앞으로 현지 분들과 작물 재배하는 법을 배우고 함께 경작하는 걸 생각하고 있어요. 제 결심이 무너지지 않도록 기자님이 증인이 돼주셔야 해요.”
※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 중앙SUNDAY에 ‘스포츠 오디세이’ ‘스포츠다큐-죽은 철인의 사회’를 연재하고 있다. 중앙일보 스포츠부장을 역임했고, 2013년 이길용 체육기자상을 수상했다. 연세대 국문학과,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에서 공부했고 한국체대에서 스포츠산업경영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희대와 한양대 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