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국민일보
대학교수로 예술 분야에 조예가 깊은 남편은 가끔 나를 ‘둔순이’라고 놀린다. 성격이 털털해 뭐든 까다롭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색을 구별하거나 조화를 보는 눈은 놀랍다고 한다. 나의 감각이 그런 방면으로 쏠린 모양이다.
대학 졸업 후 나는 전공과 전혀 다른 길로 들어섰다. 패션이었다. ‘남의 글 타이핑 치는 것보다 내 일을 하자’며 진로 고민을 하던 중 ‘좋아하는 게 힘’이라는 생각에 자연스레 디자이너의 길로 들어섰다.
국제패션연구원에서 의상을 공부하고 1979년 하얏트호텔 지하에 의상실을 열었다. ‘당신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찾아 드립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자작부인이란 뜻의 바이카운티스 부티크를 열었다.
내 입으로 말하기 쑥스럽지만 톱 디자이너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30대 중반, 조금은 이른 나이였다.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는 맞춤복’을 잘 만드는 디자이너로 알려지면서 상류층 여성들이 찾기 시작했다. 대기업 오너 부인들은 단골손님이 됐고 유명 음악가들은 연주복으로 입기 시작했다. 앙드레 김과 함께 ‘오트 쿠튀르’를 상징하는 디자이너가 됐다.
3김 시대 정치인 사모님들도 찾아왔다. 이희호 여사와 김윤옥 여사의 의상은 퍼스트레이디가 되기 전부터 담당했고 나는 역대 퍼스트레이디의 옷을 가장 많이 만든 디자이너가 됐다.
대중에게도 이름을 알렸다. 1984년 당시 최고 인기드라마였던 ‘사랑과 진실’에서 배우 원미경이 내 옷을 입은 뒤 ‘이광희’란 브랜드는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됐다. 선을 볼 때 ‘이광희’ 옷을 입고 나가면 혼사도 잘 이뤄지고 결혼하면 잘 산다는 말이 회자됐다.
이렇게 ‘톱’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마음에 간직했던 나름의 원칙이 있었다. 첫 번째 원칙은 아버지와 어머니 말씀이다. 평생 ‘참’을 찾아 사셨던 아버지는 내가 디자이너 일을 하겠다고 했을 때 오직 ‘정도를 걸어라’는 말씀을 해 주셨다. ‘혼을 박아서 일하라’는 어머니의 말씀과 함께 내가 일하는 방법으로 자리했다.
두 번째 원칙은 어려운 길로 가는 것이었다. 마태복음 7장 13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처럼 일을 하는 방법에서 선택의 순간이 있을 때면 쉬운 길 대신 어려운 쪽을 선택했다.
정도를 지키고 혼을 담아 어렵게 옷을 만든다는 것은 정성을 다해 옷을 만든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유명세를 탈수록 고민이 깊어졌다. ‘상류층 패션 디자이너라는 일이 내게 맞는 일인가’라는 질문이 계속 맴돌았다. 어머니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스웨터와 외투를 만들어 주시는데, 그 딸은 최상류층이 찾는 비싼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가 됐으니 말이다. 어머니가 명쾌한 답을 주셨다.
“너는 너대로 거기서 그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 여기 해남에서 일을 하는 건 네 역할이 아니다. 네 역할은 디자이너라는 너의 직분을 잘 해내는 것이다.”
어머니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맞는 일을 맡긴다’는 해법을 주셨다. 그렇게 답은 찾았지만, 고민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니었다.
정리=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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