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광희 (13) 패션 디자인을 예술로… 선구자·개척자의 삶
내 이름 건 브랜드로 패션쇼 큰 성공 후 유명 예술인들과 작품·무대장치 콜라보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34206&code=23111513&cp=nv
1980~90년대는 패션을 과소비나 사치를 조장하는 사업으로 여기던 때였다. 패션 디자이너에 대한 편견도 컸다. 부정적 인식을 바꾸기 위해 패션도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생활문화의 한 영역이라는 인식을 심는 게 내게 주어진 임무라 여겼다. ‘하나님께 칭찬받는 옷을 만들겠다’는 평소 기도제목과도 일맥상통했다.
패션을 예술적 영역으로 끌어올리려는 노력은 86년부터 시작됐다. ‘이광희 룩스’라는 내 이름을 건 브랜드를 런칭하면서 진행한 대규모 패션쇼였다. 국내 디자이너로선 처음으로 정기 컬렉션을 하겠다는 선언을 하면서 윤형주씨가 총감독을, 김중만 작가가 사진 작품을 맡았다. 의상에 걸맞은 무대장식부터 테이블 세팅에 이르기까지 디테일하게 종합예술의 면모를 갖추도록 노력했다.
88년 서울올림픽기념 초청패션쇼에선 ‘살아 움직이는 전시회’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가로 15m, 세로 9m에 달하는 무대 위 대형 배경막(백드롭)에 재불 화가 이항성 화백의 순수 회화작품 40여점을 올렸다. 국내 최정상의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 선생과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클래식이 함께하는 패션쇼로 진행해 화제가 됐다. 지금이야 장르 간 융합인 콜라보레이션이 일반화됐지만, 33년 전 이러한 시도는 문화적 충격을 줬다.
93년 대전엑스포에서는 문화행사 대표로 참석해 우제길 화백의 주제인 ‘빛과 그림’을 옷과 무대장치에 도입했고 김창희 윤영자 선생님 등 조각가, 예술가들과의 협업을 지속했다.
92년부터는 남산자락에 ‘갤러리 룩스’를 오픈해 살롱문화를 보급했다. 크고 작은 패션쇼와 음악회 미술전시회 문화강좌 등을 열면서 패션이 생활문화의 한 장르임을 알리려 했다.
창작활동을 인정받아 94년 아시아패션진흥협회가 정한 ‘올해의 아시아 디자이너상’의 국내 첫 번째 수상자로 선정됐고 2000년 대통령 산업포장을 받았다. 클래식 공연에만 무대를 내줬던 호암아트홀이나 예술의전당 등에서도 패션쇼를 개최할 수 있게 됐다. ‘패션이 예술이냐’는 비판을 도전과 노력으로 뒤집은 것이다.
2000년엔 해외 명품들이 장악한 갤러리아백화점 명품관, 부산 파라다이스호텔의 파라디아 명품관에 한 자리를 차지했다. 국내 브랜드에는 명품이 없다는 시각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그때 백화점 입점을 위해 인터뷰했던 내용도 기억이 난다.
“일하는 게 힘들지 않느냐”는 백화점 사장의 질문에 나는 “원래 사는 게 힘든 것 아니냐”고 답했다. 일을 쉽게 하지 말고 편한 것을 견제하자. 이게 일천한 경험을 통해 얻은 내 삶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쉽게 하는 방법들에 유혹도 받았고 포기할 수밖에 없는 정당한 이유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어떻게 일을 하느냐’가 ‘어떻게 사느냐’와 같은 과제라고 생각했다. 일을 쉽게 하려는 것은 내 삶을 쉽게 던져버리는 것과 다름없다고 여기며 나 자신의 마음을 다지곤 했다.
정리=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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