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가 되어 주세요.” 서울 남산의 ‘이광희 부티크’에는 이런 간판이 걸려 있다. 지난 12월 5일과 6일에는 이 이름으로 나눔 축제도 열렸다. 정•재계와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단골이어서 ‘대한민국 1% 패션디자이너’로 불리는 이광희씨(60)가 요즘은 가장 가난한 이들, 지구상에서 제일 어렵게 사는 이들을 위한 산타로 거듭나고 있다.
2009년부터 아프리카 남수단에 망고나무를 심고, 최근에는 복합교육문화센터 ‘희망고 빌리지’를 건립한 그는 요즘 패션디자이너로서보다 사단법인 ‘희망의 망고나무’(희망고)의 대표로 사회사업 운동가로 더 활발한 모습을 보인다. 지난 10월에는 한국청소년연맹과 해외봉사활동을 통한 청소년 인성교육 MOU도 체결했다.
잠자는 시간 외에는 하루종일 희망고 생각으로 산다는 이광희씨를 남산 사옥에서 만났다. 상류사회 부인들을 위해 옷을 짓는 그는 정작 항상 후드티셔츠에 납작한 검은 운동화 차림이었다. 사진 촬영을 위해 갈아 입고 신은 재킷과 구두도 몇 년 동안 계속 보아온 것들이다. 그리곤 다짜고짜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을 보여주며 “톤즈에 오이씨앗을 뿌렸는데 드디어 열매를 맺었다”면서 즐거워했다. 대한민국 부르주아 계급의 상징이던 그가 후원금 3만원을 위해 밤샘작업을 하고 오이 하나에도 마냥 행복해하는 이유가 뭘까.
이번 축제에 산타는 많이 참석했나요.“마침 그날 갑자기 폭설이 내려 교통사정도 나빴는데 다들 많이 와주셨어요. 오랜 내전과 빈곤으로 신음하고 있는 남수단 아이들을 위해 더페이스샵과 샘소나이트 등 기업체에선 희망고를 주제로 한 기획상품까지 만들어주셨고요. 물품 기부와 함께 직원들이 자원봉사로 참여했습니다. 홍명보장학재단에서는 홍명보 감독의 사인볼을 기부했어요. 매우 고맙고 감사하죠.”
그런데 왜 수단 톤즈 지역이고, 왜 망고나무인가요.
“2009년에 처음으로 월드비전 김혜자씨와 함께 그 지역에 갔어요. 20년 넘게 내전과 기근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고통 받는 슬픔의 땅이죠. 가족을 잃고 생계가 막막한 이들, 당장 먹을거리는 물론 세수할 물조차 없는 지역민들을 보니 눈물조차 안 나오더군요. 그들을 위한 식량 지원과 옷을 나눠주면서 전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어요. 우연히 만난 한 아주머니가 자기는 과부인데 망고나무를 길러 아이를 셋이나 키웠다고 하더군요. 망고나무는 한 번 심으면 5년 후에 첫 열매를 맺어 100년 동안 1년에 두 번 수확할 수 있다면서요. 그래서 당시 제가 가진 돈을 다 털어 망고나무 100그루를 사서 나눠주고 왔어요. 한 그루에 15달러 정도인데, 나무 한 그루가 온가족에게 희망을 주고 평생 먹거리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죠.”
패션디자이너로로 바쁜데 NGO까지 만들 필요가 있었나요.
“월드비전을 비롯해 훌륭한 국제기구가 있지만, 전 제 방식대로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저 후원금을 모금해 음식과 옷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정말 현지인들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들과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를 찾아내서 같이 희망을 키워나가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희망의 망고나무란 뜻도 되고, 희망의 북소리란 뜻도 되는 ‘희망고’를 만들었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저 한 번의 방문으로, 추억으로만 남기려고 했어요. 그런데 수단 톤즈에 다녀온 후부터 마음속에서 자꾸 망고나무가 자라고, 꿈에서도 그들의 얼굴이 떠오르는 거예요. 제가 서울에선 두통과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했는데 그곳에서는 두통도 사라지고 잠도 너무 잘오더군요. 남수단 톤즈로 가려면 서울에서 아랍에미리트연합, 두바이, 다시 케냐의 나이로비를 거쳐 남수단 수도 주바에 내린 후 경비행기로 룸벡이나 와우를 통과해 다시 자동차를 몇 시간 타야 톤즈에 도착합니다. 가기 전에 아프리카 풍토병 예방주사도 맞아야 하고, 현지에선 텐트에서 숙식을 해결해요. 그렇게 몸은 불편한데 마음이 편해지고 자꾸 아이디어가 떠올라요.”
“예, 남수단 정부가 1만평의 땅을 무상으로 주어 지난 10월에 건물이 완공되었고, 내년 1월부터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갑니다. 제가 지난 3년 동안 톤즈에 가서 망고나무만 심어준 것이 아니라 마을사람들에게 진심을 전달한 결과 같아요. 톤즈 지역은 고 이태석 신부가 병원과 학교를 설립해서 ‘울지마 톤즈’로 유명해진 곳이지만 구호단체는 물론 개인에게 이렇게 큰 땅을 허가한 것은 처음이라더군요.
망고를 심고 열매를 맺기까지 5년이 걸리거든요. 망고가 열리는 동안에 톤즈 시내에 새로 사업장을 열어 여성들을 위한 기술교육과 어린이교육을 하고 싶었어요. 톤즈 주지사와 군수를 몇 차례 만나서 NGO 허가를 요청했죠. 제가 주지사 바로 옆에 앉아서 톤즈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고 싶다고 말했어요. ‘당신과 내가 시스터와 브라더라고 생각하고 돕는다면 가능하다’고 말하자 주지사는 좋다고 했어요. ‘지난 3년간 마마리(그곳에서 이광희씨를 지칭하는 말)는 최선을 다해 약속을 다 지켰다’면서요. 희망고 빌리지는 엄마들이 재봉기술을 배우는 곳, 아이들을 위한 유치원, 기술학교 등으로 운영될 겁니다. 엄마는 재봉과 미용 등을 배우고, 아이들은 바로 곁의 유치원에서 놀고, 아버지는 근처의 작업장에서 의자나 침대 등 가구를 만들 거예요. 흙바닥에서 자고 밥도 제대로 못먹던 아이들이 일단 깨끗한 환경에서 자라게 되고, 엄마들 역시 아이 키우며 돈을 벌 수 있으니 온가족이 평화를 얻게 되지 않을까요.”
그런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나오나요.
“전 돈도 힘도 조직도 없어요. 단체에서 일한 경험도 없고요. 톤즈의 경우엔 일단 공무원들에게 현지 주민, 특히 어머니들을 모아달라고 했어요. 우리가 일방적으로 주는 구호물품을 전달하는 것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알고 맞춤형 지원을 해주고 싶었습니다. 마치 반상회 분위기로 아줌마들이 모였는데, 세상에 어쩜 그렇게 손을 번쩍번쩍 들고 말을 잘하는지요. 우리는 대부분 아이들을 위한 교육에 치중하는데, 엄마들이 자기도 영어 배우고 싶고, 기술 배워서 경제적 자립을 하고 싶다는 거예요. 미싱 한 대만 있으면 옷을 만들거나 수선업을 해도 돈을 벌 수 있고, 아프리카 사람들은 가난해도 멋을 잘 부려 도시엔 미용실이 한 집 건너 있어요. 의자와 가위만 있으면 된다고 해요. 제일 좋은 것은 현장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거죠. 제가 20년 전부터 자선패션쇼를 열어 모은 수익금으로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행사 등을 했는데, 한국에서 최초로 탁노소, 즉 낮에 병든 어르신들을 돌봐드리는 시스템도 기획했어요. 어려운 분들과 가족을 만나 직접 목소리를 들어보면 아이디어가 나와요.”
부모님도 봉사활동을 하셔서 상도 많이 타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버지(고 이준묵 목사)와 어머니(고 김수덕)는 한국전쟁 때 전라도 해남으로 가서 90평생을 고아와 병자들을 위해 일하셨죠. 간호사 출신인 어머니는 200여명의 아이들을 먹이고 씻기고 입히면서도 행복해 하셨습니다. 제가 낡아서 버린 커튼천으로 옷을 지어 입으시고 아이들 먹이느라 당신은 제때 식사를 못해 몸무게가 항상 40㎏을 넘지 못하셨는데도요.‘해남의 등대’로 불릴 만큼 존경을 받았지만 전 솔직히 그런 부모가 좀 부담스러웠어요. 목사 딸이라고 밝힌 것도 얼마 전이에요. 그런데 DNA만이 아니라 환경유전자, 즉 보고 들은 것도 무시할 수 없나봐요. 저도 나이 드니 자꾸 부모님처럼 이웃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외적으로는 엄청난 성과를 거뒀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닐텐데요.
“수시로 저한테 투덜거리죠. ‘왜 내가 이 일을 하는 거야’ ‘내가 미쳤지’라고요. 사실 우리 희망고는 다른 NGO와 달리 보도자료나 영상이 너무 밝아요. 제가 그곳에 가서 나무 심는 장면, 어머니들에게 옷감을 나눠줘 옷을 만들어 패션쇼를 하면 춤추고 웃는 장면, 아이들이 축구를 하는 모습 등을 보고 누가 후원금을 내고 싶겠어요? 더구나 다들 제가 엄청나게 부자인 줄 알거든요.(웃음) 후원금을 모으는 일도 어렵고, 체계가 갖춰진 재단이 아니어서 전문가들도 부족해 여러 가지로 다 신경을 써야 하죠. 기업체나 단체에 가서 희망고 협조요청을 하다보면 항상 똑같은 말을 해야 하니 가뜩이나 내성적이고 낯을 가리는데 스트레스도 받고요. 오해도 받고 우여곡절도 많지만 그래도 톤즈의 희망고 빌리지가 기적처럼 만들어지고 다른 단체에서도 벤치마킹하기도 하니 멈출 수도 없죠.”
기적을 만든 가장 큰 동력은 뭔가요.
“모든 것은 작은 관심에서 시작됩니다. 전 자선•기부•후원 등의 말을 싫어해요. 저는 현장에서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현지인들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수혜자들, 현지인들이 주인공이어야 하고, 그들을 잘 살게 해주려는 것이 목적이지 우리가 생색내는 것이 아니잖아요. 망고나무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은 후에도 마을 분들을 모아 ‘망고나무 심는 것, 어떻게 생각하나?’ ‘나무 심기에 동의하나?’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느 가정에, 몇 그루씩 어떻게 나눌 것인가’ 등을 함께 논의했어요. 아프리카 사람들이 미개하거나 무식한 게 아니에요. 상황이 어려울 뿐이죠. 그리고 뭐든지 쉽게 생각했어요. ‘희망고 빌리지’도 거창하게 설계하고 인테리어 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건물을 만들어 방 한 칸에 아이들을 모아 놀게 하고 밥 먹이고 공부시키고 옆방에 엄마들이 재봉기술과 영어 공부를 하게 하자… 이게 시작이에요. 엄마가 일하러 나간 동안에 땅바닥에 뒹굴고 흙먹던 아이들이 깨끗한 바닥에서 생활하는 것만으로도 건강해지거든요. 작은 환경 변화가 가정의 행복을 가져온다고 믿어요.”
사실 정치인이나 NGO 간부와 친하면 평생 노상강도를 만나는 것이란 농담이 있을 만큼 후원금에 신경이 쓰입니다.
“저도 항상 희망고 사람들이나 톤즈 지역민에게 자급자족을 강조합니다. 망고 먹고 팔고, 옷도 만들어 입고 팔고, 가구도 쓰고 팔고…. 자급자족 이후에 수익사업을 정착시켜서 외부 도움 없이도 그들이 생존할 수 있도록 기술을 지도하고 있죠. 조장으로 뽑힌 어머니들에게 ‘당신들이 몇 개월 뒤에는 선생님이다. 잘 배워서 제자들을 양성해라’고 하면 신나서 배워요. 리더십과 자긍심이 생기는 것이 보입니다.”
희망고가 발족한 지 3년인데 본인은 무엇이 가장 달라졌나요.“참 신기하죠? 그 머나먼 곳의 톤즈 사람들을 돌보면서 이제야 제 자신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항상 바쁘기도 하고, 운동에는 영 취미가 없었는데 요즘은 제 건강과 체력에 신경을 씁니다. 제가 건강해야 아프리카 전염병 예방주사도 맞고, 수십 시간 동안 네댓 번 비행기를 타고 톤즈에 갈 수 있어 요즘 매일 아침에 남산로를 한 시간씩 산책합니다. 또 내성적이고 낯가림도 심하고 말도 잘 못했는데 이제는 외향적이 되었어요. 제가 밝게 웃고 먼저 말을 걸고 설명해야 희망고에 관심을 가져주니까요.”
외국 원조도 좋지만 주변에도 도울 곳이 많은데요.
“한국청소년연맹과 함께 우리 청소년들을 위한 배려 캠페인을 벌일 겁니다. 우리 사회에 심각한 범죄가 급증하고 자살이 많은 것도 배려심 부족이라고 생각해요. 우선 우리 청소년들을 상대로 아프리카 지역의 가난한 주민 돕기 교육과 훈련을 시키려고 계획 중이에요. 세계시민 교육, 가난한 이웃의 자립을 이끄는 리더 교육을 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아요. 우리 청소년들에게는 한 끼의 밥보다 평생 인품과 인격, 결국 인생을 결정짓는 배려심이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요.”
만약 그가 톤즈에서 그저 그들의 눈물만 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가 본 망고나무 한 그루가 톤즈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삶에도 희망의 북소리를 울리는 것 같다. 환갑 나이에도 열여섯 소녀처럼 보이는 이광희 디자이너, 혹시 천사의 날개를 감춘 것이 아닌가 싶어서 그의 옆구리를 슬쩍 찔러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