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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이광희씨가 지난 25일 서울 한남동 이광희부티크에서 남수단 톤즈에서 10년간 진행한 ‘희망의 망고나무(희망고)’와 지난 3월 완공한 한센인복합센터 프로젝트를 이야기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해가 지는 아프리카 광야는 이질적이다. 아름다운 풍광과 공포가 공존한다. 어디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공포 말이다. 190㎝를 넘는 장신의 아프리카 남성도 그런 공포 중 하나였다. 저물녘 트럭 차창 너머로 보이는 검은 실루엣의 이 남성은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실체를 드러냈다. 얼굴의 한쪽은 녹아내린 듯 무너졌고 눈도 사라졌다. 왼쪽 팔도 없었다. 두려웠다. 조심스럽게 차창과 문을 잠갔다. 그게 시작이었다.

디자이너 이광희(67)씨가 올해 초 남수단 톤즈에 문을 연 한센인 교회 이야기다. 지난 25일 서울 한남동 남산자락의 이광희부티크에서 만난 그는 ‘희망의 망고나무(희망고)’ 10년의 이야기 대신 한센인 교회 이야기부터 꺼냈다. 배경은 톤즈다. 아프리카에서도 오지로 불리는 이곳은 오랜 내전으로 폐허가 됐고 사람들은 말라리아와 콜레라로 죽어간다. 한센병 환자들도 많다. 이씨는 “같은 아프리카인 케냐보다 100년은 뒤처진 곳”이라고 했다.

그가 톤즈와 인연을 맺은 건 2009년 3월 국제구호개발기구 월드비전을 통해서였다. “처음 톤즈에 갔을 때는 비가 오지 않는 건기였어요. 풀은 없고 황토만 가득했죠.”

남수단을 가난한 나라로만 기억하던 그의 마음에 울림을 준 건 우기에 맞춰 톤즈를 다시 찾았을 때였다. 황토가 비를 맞아 싹을 틔웠다. “‘푸른 들판에 소가 먹을 건 있는데 사람이 먹을 건 왜 없지. 여기 참 할 일 많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톤즈의 초록빛 땅을 보고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밤낮을 눈물로 보냈다. 그리고 택한 게 망고나무였다. 마케팅 전문가인 남편 홍성태 한양대(경영학과) 교수가 지어준 ‘희망고’라는 이름으로 재단을 만들었다. 쉽지는 않았다. 장신의 딩카족은 호전적인 데다 자존심도 셌다. 그러나 이씨의 한마디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희 거다. 너희가 지켜야 한다”고 했다.

이광희씨는 희망고 프로젝트를 통해 미싱학교에서 재봉 기술을 알려주고(왼쪽 사진) 망고나무 4만 그루를 심었다. 이광희 제공

그렇게 심은 망고나무가 벌써 4만 그루나 됐다. 망고나무보다 더 신경 쓴 것은 교육이었다. 2011년 남수단 정부의 도움을 받아 3만3058㎡(약 1만평)의 땅에 복합교육문화센터인 ‘희망고 빌리지’를 세웠다. 고인이 된 앙드레 김과 함께 우리나라 오트 쿠튀르를 대표하는 디자이너의 실력도 발휘했다. 재봉틀을 가져가 현지인들에게 재봉기술을 알려줬다. 아이들 교복은 재봉기술을 익힌 어머니들이 만들었다.

2014년 새로운 도전이 찾아왔다. 무릎을 다쳐 다리를 쓸 수 없는 상황에서 대신 톤즈를 찾은 희망고 직원이 사진을 가져왔다. 한센인 사진이었다.

“우리는 의료사업 안 한다며 사진을 덮었어요. 그런데 희망고 때처럼 온종일 울었어요. 손님 앞에서도 울고, 그냥 눈물만 흘리는 게 아니라 서럽게 울었어요.”

그리고 그해 11월 새벽 꿈에서 특별한 경험을 했다. 장신의 한센인 남성들이 그에게 안겼다. “말 그대로 ‘퍽퍽’ 안겼어요.”

가족들은 말렸지만 “아무래도 우리한테 준 미션인가 보다”라며 희망고 직원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이야기했다. 이듬해 1월 톤즈 원주민들에게조차 버림받은 한센인들을 만나 밀가루를 지원했다. 그리고 해 질 녘 바로 그 한센인 남자를 만났다. 밀가루를 받지 못한 남자는 절박한 심정으로 트럭을 찾았다. 이후 이씨는 모든 한센인들을 지원하겠다며 한센인복합센터를 짓기로 했다. 교회 대신 복합센터라 이름 지은 이유는 단순했다. 예배부터 교육과 의료 지원까지 모두 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준비부터 완공까지 4년이 걸렸다. 책임자는 다섯 번이나 바뀌었다. 포기하기 직전에 현지인들이 직접 나섰다. 벽돌을 나르고 쌓았다. “건축비로 남은 돈은 빼돌려도 될 법한데 저한테 페인트를 사서 칠했다고 자랑하더라고요. 희망고 빌리지 미싱학교 졸업생들도 도움을 줬어요. 남자 옷 150벌과 여자 한센인 가족을 위한 침대커버도 만들었어요.”

지난 3월 톤즈의 한센인 거주지역을 다시 찾았다. 완공 축하 자리에서 한센인들은 그에게 “약속을 지켜줘 고맙다”고 했다.

인터뷰 내내 이씨는 눈물을 참기 위해 여러 번 말을 멈췄다. “한센인 건물 짓고 와서는 잘 안 운다”고 호언장담했지만, 한센인과 아버지 고 이준묵 목사를 이야기할 때 유독 목이 메었다. 이 목사는 전남 해남 땅끝에서 전쟁 고아들과 한센인들을 돕는 데 일생을 바치며 ‘맨발의 성자’로 불렸다. 그는 “희망고도, 한센인교회도 아버지가 하신 일을 이어가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090970&code=23111111&cp=nv

2019.07.31   by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