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17국민일보-역경의열매]이광희 (10) 어릴 때 난 씩씩하게 인사하고 생글생글 웃는 ‘방울새’

 

등대원 아이들에게 먹을 것 양보하고 스스로 공부해 명문 전남여중 들어가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33538&code=23111513&cp=nv
이광희 디자이너가 6살 때였던 1958년 해남의 사택 앞마당에서 아버지 이준묵 목사의 등에 업혀 있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해남등대원을 설립하기 1년 전인 1952년 2남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전쟁 직후 고아와 과부, 한센인들에게 우리 집은 쉼터였다. 당시 대표적 지식인으로 꼽히던 함석헌 선생님, 장공 김재준 목사님도 우리 집 단골이셨다.

함 선생님은 유독 기억에 남는다. 세상은 그분을 ‘행동하는 지성’이라 했지만, 내겐 그저 하얀 두루마리, 하얀 수염의 할아버지였다. 선생님은 당신의 무릎에 앉아 놀던 나를 유독 예뻐하셨다. 한번은 함 선생님이 인형을 선물로 주셨는데, 눕히면 눈을 감고 세우면 눈을 뜨는 인형이었다. 장난감이 없던 시골에선 신기한 것이어서 아직도 기억이 난다.

교회와 손님, 어려운 이웃들을 보살피시는 부모님을 나는 ‘엄마’ ‘아빠’라 불러본 적이 별로 없다. 나까지 그렇게 부르고 찾으면 왠지 더 힘들게 해드리는 것 같았다.

어릴 적 함께 살던 친척 언니는 팔순이 넘은 지금도 그때의 내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너희 어머니가 등대원 아이 중에서 약한 애들을 데리고 와서 같이 살게 하셨어. ‘아무리 내가 잘해도 사랑이 부족하다. 사랑을 줘야 한다’며 마음 아파하셨지. 너희 형제들과 등대원 아이들에게 밥도 같이 먹이고 비타민 같은 약도 똑같이 나눠주셨어. 그런데 너는 주는 약이며 밥을 다 안 먹고 ‘등대원 친구들이 더 먹어야 한다’며 갖다 주는 거야. 어린애가 양보를 잘했던 모습이 이상해서 기억이 난다.”

부모님에게 어리광을 부리거나 떼를 쓰지도 않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일이다. 급성 맹장염에 걸려 수술을 해야 했다. 당시로선 큰 수술이라 광주까지 가야 하는데 구급차도 택시도 없었다. 트럭에 탄 채 포장도 되지 않은 길을 덜컹거리며 5시간을 달려 광주로 갔다. 밤늦게 수술이 끝났는데 의사들에게 칭찬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아픈데 울지도 않고 참는 게 어른 같았다고. 그런 나를 사람들은 ‘방울새’라 불렀다. 친척 언니가 그 의미를 알려줬다.

“마을 어른들에게 씩씩하게 인사하고 생글생글 웃는 게 ‘방울새’ 같았지. 항상 웃는 낯이니 ‘늘 좋은 일이 있구나’ 생각할 정도였어.”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 마음에 부모님께 부담을 지워드리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였는지 모르지만, 공부도 스스로 했다. 학창시절 내내 부모님께 성적표를 보여드리지 않았지만, 성적은 꽤 좋았다.

그런데 초등학교 6학년 때 광주의 큰아버지 댁에 가서 살게 되면서 지방과 도시의 학력 격차를 경험했다. 해남에선 덧셈 뺄셈만 배우고 갔는데 광주에선 이미 비율이며 소수 같은 것을 배우고 있었던 게 기억난다. 해남초등학교에선 공부를 꽤 했는데, 광주에 가니 열등생으로 밀려났다. 학급석차대로 앞에서부터 앉혔는데 내 자리는 뒷문 바로 옆이었다. 6개월 뒤 전남여중에 입학했다. 입학시험이 있던 시절, 전남에선 최고로 꼽히던 명문학교였다. 우리 반에선 나를 포함해 단 5명만 합격했다.

정리=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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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17   by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