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희 디자이너가 2009년 패션쇼에서 선보인 웨딩드레스. 어머니 김수덕 사모가 일생동안 품었던 십자가의 마음을 작품에 담았다.

화려해 보이는 디자이너로 승승장구했던 이야기만 하니 편하게 살았을 것이라 오해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일을 하면서 크고 작은 부침이 있었다. ‘내 것’이라고 이뤄놓은 물질들을 다 흘려보낸 적도 있다.

우선 성격부터 사업과 맞지 않아 힘들었다. 패션사업이라는 게 미적 재능만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영업과 판매 감각도 필요한데 내성적이고 낯가림이 많아 사람들에게 말도 걸지 못했다. 고객이 오면 화장실에서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안정시켜야 얼굴을 대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말이 없으니 괜한 오해를 사기도 했다. 희망고를 시작한 뒤 예전과 비할 수 없이 외향적으로 바뀌었지만, 낯선 사람들과 말을 많이 나눈 날은 아직도 힘들어서 어쩔 줄을 모른다.

다행히 내 인생철학은 남의 시선보다 스스로에게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에 더 집중했다.

고객이 옷 한 벌을 맞추면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여러 벌 만들었다. 끊임없이 새로움을 선보이기 위해 정기컬렉션도 1년에 2~3회씩 열었다. 작업량도 많고 정신적으로나 재정적으로 부담이 컸지만 말이다.

디자이너 일을 한 지 20년째 됐을 때다. 내 것이라고 어렵게 하나 갖게 된 것이 바로 남산의 본점이었다. 아름다운 문화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공들여 가꿔놨던 본점을 1995년 ‘남산 제모습 찾기’ 사업을 위해 서울시에 내놔야 했을 때는 서운하고 아쉬웠다.

그때 ‘우리가 가진 것은 언젠가는 두고 가는 것이고 그 시기가 조금 빨리 온 것뿐’이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자유로워졌던 기억이 난다.

디자이너 40년, 이처럼 크고 작은 일들을 경험하면서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날까”라는 억울한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날 버티게 한 건 어머니의 “주신 대로 받아라”는 말씀이었다. 덕분에 힘들 때마다 나는 “나라고 이런 일 겪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이 일을 통해 내가 배우고 얻는 것은 무엇인가”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어려움도 해결되곤 했다.

언젠가 어머니께 들었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옛날 어떤 사람이 살기 어려운 일이 많아 더 이상은 못 참겠다며 깊은 산으로 길을 떠났단다. 그런데 깊은 산 속에 들어가니 더 성가신 것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피하고 싶은 역경이나 힘든 고비란 누구에게나 있지 않을까.

성경은 “하나님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고난을 주신다”(고전 10:13)고 하셨다. 어려움도 다 감당할 만큼 주신다.

‘창조적 고통’을 쓴 폴 투르니에는 고통을, 진정한 인간이 되기 위한 필수조건이라 했다. 고통 자체가 인간을 성장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고통 없이는 인간이 발전하지 못할 것이다. 상처가 고통을 주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치료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구름이 각양각색이듯 우리가 마주하는 삶의 고비도 다양한 형태로 온다. 나는 언젠가 구름이 꼭 걷혀 해가 날 것이라는 믿음, 그 믿음으로 오늘을 산다.

정리=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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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23   by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