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진실’로 전국민에 이름 알려
패션· 예술 접목해 톱디자이너로 우뚝
배우 김혜자씨와 인연,
아프리카 톤즈에 희망고빌리지 세워
패션디자이너 이광희 대표(이광희 부티크)의 별명은 ‘만년소녀’다.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도통 나이를 짐작할 수 없게 맑고 고운 데다 말도 열여섯 소녀처럼 수줍은 듯 조곤조곤 하는 까닭이다. 모두가 인정하는 40여년 경력의 톱디자이너지만 말과 행동 어디에도 힘 주는 법이라곤 없다.
이 대표는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종묵 목사와 어머니 김수덕 여사 사이의 2남3녀 중 넷째, 딸로는 둘째였다. 이화여고를 나와 1970년대에 한창 인기 있던 이화여대 비서학과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때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했어요. 결혼용 간판으로나 쓰일 대학 졸업장이 왜 필요한가라는 생각이었죠. 하도 우기니 선생님들이 비서학과처럼 실용적인 학과에 가면 취업이 잘된다고 구슬리셨어요.”
실제 졸업도 하기 전 외국회사를 비롯, 여기저기서 오라고 야단이었다. 그는 그러나 비서 업무가 영 내키지 않았다. 망설이던 중 누군가 “패션디자인을 공부해보라”고 권했다. 국제복장학원에서 2년동안 디자인과 봉제 등 실무를 배우고 익혔다. 전공 쪽으로 취업은 하지 않았지만 대학 시절 배운 경영이론 등은 사업의 바탕이 됐다.
1979년 서울 중구 하얏트호텔 지하에 ‘바이카운티스(Viscountess, 자작부인)’를 열었다. 남산 시대의 개막이었다. 이후 그는 내내 남산에서 맴돌았다. “다소 외곬수인데다 북적이는 걸 피하는 탓인지 남산이 좋았어요. 결국 디자이너들 대부분이 강남으로 자리를 옮길 때도 남산에 남았어요. 덕분에 부동산테크와는 멀어졌지만요.”
이 대표의 옷은 초기부터 예쁘고 여성스러운 것으로 정평이 났다. 입소문이 퍼지던 중 1984년 드라마 ‘사랑과 진실’ 여주인공의 의상을 맡게 됐다. “협찬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이에요. 우연히 가게를 찾은 원미경 씨를 도와주려던 거였어요.”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했는데 결과는 어마어마했다.
“그야말로 대박이었어요. 시청률이 78%였으니 장안의 화제였죠. 드라마를 보던 사람들이 도대체 어디 옷인데 저렇게 예쁘냐며 난리가 났어요. 내가 만들었지만 지금 봐도 정말 이뻐요. 돈은 내옷을 본따서 만든 남대문 시장 사람들이 다 벌었지만요.”
드라마는 이 대표를 일약 톱디자이너 반열에 올려놨다. 패션계와 고객의 기대와 호응에 그는 정성과 혁신으로 답했다. 1986년 ‘이광희룩스’를 런칭하고 신라호텔에서 개최한 첫 대형 패션쇼를 가수 윤형주, 사진작가 김중만 등 예술계 인사들과 함께한 문화예술 행사로 꾸민 것.
“첫 패션쇼 때부터 기부행사를 겸했어요. 기존의 패션쇼와 전혀 다른 쇼를 보면서 관객들이 놀라고 감동해 눈물을 흘리는 걸 보면서 패션을 문화의 영역으로 가져온 내 시도가 옳았다는 것을 확인했지요. 티켓값이 6만원이었는데 매진 됐어요. 수익금 대부분을 기부했지요.”
이 대표의 패션철학은 한 가지. ‘날개를 달아주는 옷을 만들자’는 것이다. “옷에 대한 관심은 어머니에게서 물려 받았어요. 아버지께서 목회를 하면서 어려운 아이들을 돌보는 등대원을 운영했는데 그 식구들의 옷을 모두 어머니가 손수 만드셨거든요. 패션 일을 하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딱 한 마디 하셨어요. ‘혼을 박아서 하라.’ 아버지는 ‘정도를 걸어라’ 하셨구요. 두 분 말씀을 경영원칙으로 삼았죠.”
이 대표의 도전은 계속 됐다. 서울 호암아트홀과 인터콘티넨탈호텔에서 개최한 ‘88서울올림픽 기념패션쇼’는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이항성 화백의 대작 40점을 배경으로 활용, ‘예술과 함께하는 패션쇼 겸 살아 움직이 전시회’라는 평을 얻었다.
이어서 ‘93대전엑스포 공식초청 패션쇼’는 ‘사랑의 한빛’을 주제로 우제길 화백의 ‘빛’시리즈와 패션의 만남을 성공시켜 ‘패션이 예술이냐’는 기존의 비판을 불식시켰다. 이같은 창작활동을 인정받아 1994년 아시아패션진흥협회가 정한 ‘올해의 아시아 디자이너상’ 국내 첫 수상자로 선정됐고, 2000년엔 산업포장 대통령상을 받았다.
매년 새로운 형태를 패션쇼를 열면서 탄탄하고 독자적인 패션세계를 구축, 국내 톱디자이너로 우뚝 선 이 대표는 2009년 패션과 전혀 다른 세상의 문을 열어 제쳤다. 아프리카 남수단 톤즈에서 희망고(희망의 북소리)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
“2009년 탤런트 김혜자 씨를 따라 남수단 아랍주 톤즈에 갔어요. 남수단은 30년 이상 내전을 치르면서 풀 한 포기도 구경하기 힘든 절망의 땅이었죠. 아무 것도 없는 그곳에서 문득 어린 시절 고아들과 어울렸던 땅끝마을 해남이 느껴졌어요. 동시에 “선한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어머니 말씀이 떠올랐지요.“
그 순간 그의 눈에 망고나무 한 그루가 띄었다. 망고는 묘목을 심고 5~7년 지나면 열매를 맺는데 무려 100년이나 수확할 수 있다고 했다. 망고를 팔아 염소나 소를 사면 한 가정이 살아갈 수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망고 묘목 한 그루는 2만~3만원. 그는 지녔던 돈을 모두 털어 묘목 100그루를 사서 나눠주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톤즈와의 인연은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귀국 후 그의 눈 앞엔 톤즈의 아이들이 계속 아른거렸다. 결국 그는 2011년 국제 NGO단체인 (사)희망의망고나무를 설립, 망고나무 심기 운동을 펼치는 한편 ‘희망고 빌리지’를 설립해 톤즈 사람들의 자립을 도왔다.
“2020년은 희망고 만 10년 패션 만 40년이 되는 해였어요. 부티크는 좀 쉬고 톤즈에 가서 희망고를 재정비하자고 마음 먹었어요. 직원들을 내보내고 떠나려던 참에 코로나19 팬데믹이 터졌지요. 도리 없이 주저앉아 혼자서 건물 정리와 청소를 했어요. 부티크를 그대로 운영하고 있었으면 어땠을까 싶어 안도의 숨도 내쉬면서요.”
그렇게 1년을 보낸 뒤 지난해엔 한 해 내내 원고를 썼다. 지난 연말에 출간한 ‘아마도 사랑은 블랙’ 준비였다. “쓰는 도중 누군가에게 원고를 보여주니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넣어야 한대요. 아픈 일이 있었으면 무슨 일로 어떻게 아팠다는 식으로요. 안그러겠다고 했어요. 옛일을 들추면 나도 아프고 상대도 아프게 해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마음은 통하는 건지 시시콜콜 적지 않았는데도 많은 분들이 공감하고 위안을 받았다고 해서 고맙고 기뻤어요.”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은 남편(홍성태 전 한양대교수)이 일러준 것이라고.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고민하고 불안해 했더니 엄마한테 쓰는 편지처럼 해보라고 하더군요. 덕분에 편한 마음으로 솔직하게 쓸 수 있었어요.”
책을 통해 위안을 받았다는 이들 덕에 자신도 힘과 용기를 얻었다는 이 대표의 올해 과제는 국립민속박물관의 이광희패션관에 내놓을 기증품을 정리하고 톤즈의 한센인마을에 초등학교 아이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한국의 근현대패션관을 만들면서 이광희부티크를 재현한다고 해요. 선 보고 약혼할 때 옷을 맞추던 일도 다룬다고 하구요. 필요한 옷을 기증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듯해요. 톤즈의 한센인마을에 아이들 교육공간을 확충해야 하구요. 황무지같던 땅에도 씨를 뿌리면 싹이 난다는 사실을 안 만큼 톤즈의 배고픔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도 더 강구해볼 참이에요.”
그동안 한 사람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최고의 옷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면 앞으론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입을 수 있는 옷, 편하고 실용적인 이지웨어를 만들어 보겠다는 이광희 대표. “고통은 비교할 수 있는 게 아니니 내 아픔이 제일 크다”고 생각하지 않고,“착한 사람보다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자고 다짐한다’는 그의 모습에 톤즈 사람들이 붙여줬다는 ‘마마리’라는 이름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섰다.
<이광희 대표>
▲이광희부티크 대표, (사)희망의망고나무 대표 ▲이화여대 디자인대학원 겸임교수 ▲‘올해의 이화인’상 ▲산업통상자원부 신지식인상 ▲대한민국 디자인대상 부문 ‘산업포장 대통령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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